이윤엽
이윤엽은 파견 미술가다. 대추리 투쟁 때는 대추리에서 살고, 박근혜 퇴진 촛불 때는 광화문 텐트촌에서 사는 식이다. 목판화가인데 단색·다색 판화는 물론 나사조립 목판 기법으로 대형 작업을 하기도 한다. 25살로 미대에 입학하기 전 극장 간판을 그리고 ‘노가다’를 살던 삶이 작품에서 선이 굵은 노동자·농민의 모습으로 녹아 나온다. 그이가 ‘백남기 할아버지’에 관해 쓴 글이 있다. ‘늘 그런 사람./ 늘 그래서/ 처음엔 모르지만 조금씩조금씩 알다가/ 어느 날 우아~ 하게 되는 사람./ 비로소 그때 정말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되는 사람’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윤엽 작가도 꼭 그런 사람 같다. 안성 작업실 겸 집에서 옆지기랑 아들내미랑 개랑 고양이랑 지내고 땅이랑 이웃이랑 벗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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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림이라는 숙명
 
이윤엽 선생은 안성에 산다. 대추리 투쟁 때는 대추리에 살았다. 안성의 작업실 곳곳에서 실제 사용하는 문짝은 당시 대추리 마을에서 떼어온 것이다. 기륭이며 용산이며 희망버스며 투쟁의 현장에 늘 함께하는 이 선생은 ‘파견 미술가’다. 그이의 판화 그림은 배지가 되고 손수건이 되고 티셔츠가 되어 고스란히 나눔이 된다. 이 선생 작품인 티셔츠 두어 장은 나도 가지고 있을 정도다.
 
왜 거칠고 투박할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안성에서 만나본 이 선생은 재밌고도 솔직했다. 생각보다 맑고, 보기보다 고운 사람이었다. 최근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라는 책으로 만나본 느낌과도 겹쳤다. 전날 글을 쓰고, 다음날 그림을 그리며 ‘고래가 그랬어’라는 잡지에 5년 정도 실은 것을 모아 낸 책이다. 그 5년의 세월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주절대는 흥으로 절로 발화하는” 시간이었다. “마감 전날 밤 되는대로 쓴” 글이었지만 ‘그때그때 나오는 대로 작업해도 되겠구나, 그렇게 살아야겠구나’ 싶은 편안감을 준, “나에게 위안이 되는 작업”이었다. 물론 읽는 이에게도 위안을 주는 책이었다.
일테면 ‘왜가리’라는 글이 있다. 화자는 다리에 줄이 엉켜서 꼼짝 못 하고 서 있는 왜가리에게 조심스레 다가간다. ‘줄을 풀어주니/ 금세 푸드덕푸드덕 날아가더라./ 그러면서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러는 거야./ 정말로 왜가리가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랬냐고?/ 나도 몰라, 그렇게 들렸어’하는 대목에서 정말 왜가리의 마음이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안해 너구리야’라는 글도 참 좋았다. 바람이라는 개랑 산에 갔는데 개가 본능에 이끌려 너구리를 사냥해 버린 사건을 담으며 사람의 마음도 같이 담았다. ‘너구리를 감나무 아래 묻어 주었어./ 그런데 그날 밤 깜짝 놀랐단다./ 감나무 위에 너구리 한 마리가 올라가 있는 거야./ 낮에 바람이에게 쫓긴 또 한 마리의 너구리였어.// 더 슬퍼졌어.’
 
“글 쓰는 행위는 동어반복적이라 지겹기는 하죠. 그림도 지겹죠. 나에게 지겨운 게 왜 그러냐면 내 안에서 계속 나오는 것들이. 내 자신이 나를 아니까 그게 뻔하니까.”
“(그래도) 그림 그리는 게 일인 사람이니까. 그림은 계속하죠... 그렇게 된 거죠...”
이 선생에게 그림은 사명감이라기보다 놓을 수 없는 일이고, 죽을 때까지의 운명이었다. 창작은 무언가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고 “내가 우주에서 하나를 만들었다는 느낌”이 크기 때문이다. 무한반복인 거 같다는 회의감을 안기기도 하는, 빤하고 뻔하고 지겨운 작업이면서도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희열의 작업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진짜 잘하고 싶어. 딱 끝났어. 그럼, 그것으로 끝”이라는 마음이다. 작업할 때는 온전히 집중하고, 완성 이후엔 “자기 맘대로 굴러다니는 게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기사에서처럼 ‘파견 미술은 결사 항전의 미술 행위였고, 작품은 이해와 의식을 달리하는 이들의 지독한 적의에 맞부딪혀 때로는 찢겨야 할 숙명을 안고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지는 현실이니 그에 적합한 생각 아닌가 싶다. 작업 이후엔 보존하는 것도, 완성도를 더하는 것도 작가의 몫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내려놓는 생각 말이다.
 
이 선생은 결혼도 출산도 그림 그리는 것도 숙명으로 받는다. “어쩌다 보니”의 소산이었다. 그이에게 숙명이란 무겁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림 그리는 건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방문 판매하는 이에게서 사준 책도 영향을 주었다. 대학생들이나 볼 법한 책이었고, 스물 몇 권이나 되는 거였는데도 무척이나 탐독했다. 마을 옆 종이 공장으로 가서는 펄프 쓰레기 더미에서 추린 종이에다 그림을 그리곤 했다. “천재적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하여간 잘 그렸어요.” 유년기부터 줄곧 그렸고 곧잘 그렸고 미술대회에서 상도 받으며 성장했다.
 
“극장 간판 그리다가, ‘노가다’하다가, 입학하고 졸업해서 그림 그리려다가 그림 못 그리고, 찻집 하다가, 찻집 하며 그림 그리다가, 개인전에서 나 개인에게 뿅 가서” ‘아, 나 이제 작가 해야지, 열심히 그림 그려야지’ 하며 예까지 걸어온 인생이었다. 학교 졸업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했을 때는 “어깨에 힘 들어간 투수”, “발에 힘 들어간 축구선수”만 같았다. “화가 하기로 결심했으니 이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록될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가장 괴로웠던 시간”이었다. 청소하고, 그림 그릴 준비하고, 그림만 그리면 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는 정작 그림은 그리지 못했다.
“작가들은 꿈을 꾸잖아요. 세상 넓게 보고, 자기주장이, 자기 세계관이 있어야 한다는데 저는 사실 그런 거 없거든요. 떠오르는 대로 그리는 스타일인데.”
“작가는 꽤나 자기 세계가 있는 일인데 나는 내 세계가 없었”기에 그릴 게 없었다는 회고다. ‘이제는 뭔가 해야 하는데’ 하면서 마당에서 불만 때다가 2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전통찻집 하면서 개량 한복 입고 진돗개 키우며” 목판화가 어울리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렸고, “한 공간에 쫙 붙여놓으니까” 작가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마음의 여유 속에 “하고 싶은 대로” 그린 거였다.
 
이 선생에겐 이환이라는 아들내미가 있다. ‘땅’이라고 이름 짓고 싶었는데 어르신들 반대가 심해서, 가족 화목을 위해서, 출생 신고하러 가는 발걸음에서 ‘환’으로 바꿨다. 대신 모이자, 단결 화목해지자는 게 지겹다는 생각으로 흩어질 환(渙)으로 지었다.
“환이에게 바라는 게 있으셔요?”
“바라는 마음 없어요.”
이 선생의 재능을 물려받았을, 사방이 그림 그리기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환이가 미술가가 되길 바라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바라는 게 없다는 마음에서 정말 아끼는 마음을 읽었다. 무언가가 돼주길 바라는 마음보다 놓아주는 마음이 더 큰 마음이라 느껴서다.
“자신에게 바라는 게 있으셔요?”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언제가 즐거우세요?”
“때때로. 하루 중에. 환이 얼굴 쳐다볼 때, (옆지기인) 이윤정과 얘기하다 잠깐, 길 가다 논바닥 보며, 바람이 확 불어올 때.”
 
“저는 저만 생각해요”라는 이 선생이 생각하는 연대는 “내가 행복하려고, 내가 좋으니까”하는 활동이다. “나 혼자 여기서 행복할 수 있지만 그건 행복이 아니야. 언니, 동생, 동네 사람들,... 다 행복해야 행복이지.” 희생과 헌신이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려는 이기적인 연대라고 강조하지만, 모두의 행복이 바로 내 행복이기에 더없이 이타적인 연대다. 해서 이 선생이 일상에서 문득 행복해하다가도 ‘내가 행복해도 되나, 세상은 이리도 비참한데’ 하는 자성으로 문득 슬퍼지지 않을까 염려가 됐다. 이 선생이 쓴 ‘좋은 사람’이라는 글에서 ‘자기 일을 하면서도 늘 세상일에 마음을 쓰는 사람/ 같이 슬퍼하고 같이 웃어 주는 사람’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으니 말이다. ‘이상하게 저절로’라는 글에서 ‘모르는 사람이고/ 아주 멀리 있는 사람들인데도/ 사람들이 슬퍼하는 걸 보면/ 이상하게 저절로 슬퍼져./ 내가 이상한 거야?’라는 물음이 우리 안에 있으니 말이다.
바람이 확 불어와, 가식을 경계하느라 저어하는 이 선생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고, 우리 역시 ‘바람이 확 불어올 때’ 그 한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안성에서, 이 집에서, 그림 그리며” 살아갈 이 선생과 작별하며 같이 행복해지자는 바람 한 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