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복
류연복은 판화가다. “죽은 나무를 칼끝으로 살리는 작업이 목판화”이며 “칼끝으로 표현된 작품이 종이에 찍힐 때, 이 나무는 열 번 찍으면 열 번을, 백 번 찍으면 백 번을 다시 살아난다”는 생각이다. 미술과 대중의 접점을 만드는 길을 걸으며 아름다움을 독점하지 않는 세상을 희망한다. 1993년부터는 안성의 국사봉 자락 밑 자연 속에 자리 잡고 ‘스스로 그렇게’ 미술의 민주화와 문화의 민주화를 꿈꾸며 여물어 가고 있다. 민족미술인협회 사무국장·사무처장,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이하 민예총) 대외협력국장, 경기민예총 이사장 등을 두루 맡은 그이의 현직은 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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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찾기유니온의 2020년 후원전시회 '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에서 류연복 선생을 처음 만났다. 당시 안성 작업실로 찾아가 인터뷰한 글을 옮겨온다.
  
고3 때 화가가 되기로 했다. 내가 뭘 잘하나 생각해보니 그림 그리기인 거 같았다. 어릴 적 유세 현장에서 저런 사람이 될 거야, 정치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외향적이지 못하고 남 앞에서 얘기도 하지 못하니 미대에 가기로 했다. ‘(대학에) 떨어지면 화가 바로 하지’ 하는 생각이었다.
 
이미 풍성했던 로맨스
 
학원에 다닐 돈은 없었다. 중고교 특별 활동으로 주 1회 하는 미술반 활동이 전부였다. 입시 공부는 집어치우고 주말에 야외 스케치를 나갔다. 공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여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눈은 뒤통수에도 있어서 의식이 됐다.
“잘 그리니까 쳐다봤던 거네요.”
“나도 내가 잘 그리는 걸 알고 있었어.”
그림을 다 그리면 남아있는 여학생들과 빵집에 갔다. ‘빼갈’ 먹던 시절이었지만 여학생들과는 왠지 빵집에 가야 할 거 같았다.
“대학 때 로맨스는요?” 물었더니 없었단다. “왜냐하면 대학 가기 전에 이미 다 있어 갖고.” 우연히 한 여학생을 그리고, 보여주고, 사귀게 되고, 매일 만나다시피 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고. 좋아서 만난 건 알지만 왜 헤어져야 했는지는 58년 개띠로 예순이 넘은 나이인 지금도, 아직도 모른다.
 
초1 때 짝꿍을 짝사랑했다. 4~5학년 때 교문에 서 있는 당번을 자원했다. “첫 여자인 걔”를 보려고 그랬다. 5~6학년 때는 스케이트장에 나가 있기도 했다.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 5학년 때 어린이 잡지에 동시를 투고해서 순천에 사는 여학생의 팬레터를 받기도 했다. 2년여 편지 왕래가 이어졌건만 엄마와 네 살 터울 형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했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남자 주인공인 토토에게 여자친구인 엘레나가 찾아온 걸 숨겨서 헤어지는데 일조하는 알프레도 아저씨가 겹친다. 마음은 다 그렇다. 편지를 숨긴 엄마와 형도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마음이었고, 알프레도 역시 '떠나서 성공하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사귈지 말지는 누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걸까. 어리더라도 본인이어야 하지 않을까. 초등학교 6학년이던 류 선생이 할 수 있던 건 고등학교 1학년인 형님을 진하게 째려봐 주는 것이었다.
 
마음 한 번 내비치지도 못한 짝사랑과 주변의 과한 참견에 좌초한 사랑과 이유도 모른 채 헤어진 사랑이지만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천진스럽게 웃는 모습이 빛나는 건 그제나 이제나 가득한 순수함 때문이라 여겨진다.
 
독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사람
 
대학교 1학년 때는 교수에게 맞기도 했다. 수업에 잘 안 들어가서인 줄 알았는데 류 선생의 충격적이고 비관적인 그림을 싫어했던 모양이었다. “연복아, 내가 손댄 건 니가 유일하다.” “굉장히 점잖은 분”이던 그 교수와는 제대 후 복학해서 화해했다.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내 평정심을 유일하게 흔든 남자가 한 명 있다고 화답했다. 서너 살 때의 큰아이였다. 좀처럼 화내지 않는 사람에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참을 수 없는 평정심의 와해를 불러오는 순간이 있더라는 고백이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면서는 ‘군사문화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간다’는 자작시를 낭독하고 머리 깎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등병으로 소대장과 첫 면담에선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 군대 생활하십시오”라고 한마디 했다. 운이 좋아 영창으로 끌려가지 않았을 뿐 류 선생이 독특한 인사인 건 확실하다.
 
4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에 간 터라 복학해선 부모님께 사각모 씌워 드리려고 공부 좀 했다. 실기실과 도서관으로 오가다가 장학금까지 받는 일도 있었다. “쌍권총부터 장학금까지” 두루 경험한 셈이었다. 물론 학점만 복구한 건 아니었다. 어떤 예술의 길을 갈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개인의 실존, 예술의 실존, 사회의 실존을 공부하고 고민했다.
‘아름답다’는 건 어떤 세력이 독점해선 안 될 영역이라 생각했다. 졸업하며 ‘서울미술공동체’를 꾸리고 미술과 대중의 접점을 만들려 했다. 미술의 민주화와 문화의 민주화를 일구고 싶었다. 엄숙함을 깨뜨리고 화랑의 문턱을 낮췄다. 화랑을 장터로 만들어 1~2천 원에 그림을 사 갈 수 있는 ‘을축년 미술 대동 잔치’도 열었다. 벽화팀 ‘십장생’에서 활동하며 집 담벼락에 ‘상생도’를 그려 잡혀가기도 했다. 문화면 인사가 아니라 사회면 인사로 활동했다고나 할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운 건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게 아니라 두루두루 나눠야 한다는 생각이 류 선생의 작품세계를 이끄는 화두인 듯하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이란 시구가 떠오른다. 예술을 누구나 알아먹는 세상이라면 밥 역시도 모두가 나눠 먹는 세상일 터이다.
좌우명을 물었더니 ‘스스로 그렇게’ 바로, 자연이라 답한다. ‘누구나’ 알아먹고 나눠야 한다는 예술관과 일하는 사람 ‘누구나’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권리찾기유니온이 만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업실 뒤가 바로 산. 마당엔 모아놓은 밤과 도토리가 있고, 처마 밑엔 손수 깎은 감이 대롱대롱 바람에 말라가고 있었다. 그이의 삶에서도 따로 떡칠하지 않은, 무언가 첨가하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충분한 멋과 맛이 느껴졌다. 안성의 소박한 늦가을 풍광이 깊어져 가고, 우리 만남의 시간도 해 질 녘 ‘술시’로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