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선
이상선의 작품은 늘 다르다. 다양한 시도로 새로움을 찾으며 어떤 장르에 갇히길 거부한다. ‘화가가 할 일은 그린다는 행위를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스토리로 전달하기보다, 그 순간 느낀 정신적, 감정적 동요 자체를 전달하는 일이라고 느낀다.’ 거창하고 심오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담는 대신 익숙한 것을 낯선 시선으로 보며 색과 빛의 흐름을 따른다. 그이에게 작업이란 즐거움이며 습관이다. ‘그냥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 하나를 그리’고 ‘조금 이상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림이 그림을 그린다.’
그런 그림 하나

이상선 작가는 성미산마을에서 별칭이 ‘까치’다. 까치라는 새와 관련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별명이고, ‘우리 시대 만화주인공’과 닮은 외모 탓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까치 시리즈를 그린 만화가의 팬이었는데, 감수성 풍부한 시절 많은 영향도 받았는데, 그이의 만화책을 다 버렸다. 다른 이의 소설책을 버린 까닭과 같다는데 그 작가의 말에, 태도에, 삶에 실망해서였으리라. 사람이 나이 먹으며 변할 수 있으니까 욕하기보다 나와의 단절을 꾀한 거라는데, 스스로 보수적이 아니라고 버티고 있지만 자신도 많이 변했을 거라고 한다. 젊은 시절 불같은 성격으로 참지를 못했다면 요즘은 인내가 특기라고 한다. 웬만해선 잘 참고 느긋해진 건 연습을 해서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그걸 알게 됐죠. 여기서 그만 손을 떼야 한다는 그 지점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마무리하지만, 과유불급의 지점을 알게 됐다니 삶도, 작품도 어느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젊은 시절 이야기 중 ‘재미있는’ 일화 하나. 이 작가와 배우자는 학생운동을 하며 만났다. 단대 학생회장과 과 학생회장으로 서로 싸우며 정이 든 관계였다. 범민족대회 행사를 마무리하던 날이었던 듯. 의장이며 대표를 맡은 이들이 시내버스 뒷자리에 같이 앉았는데 불심검문에 걸렸다. 전경이 버스에 올라오기 전에 이 작가가 총대를 메고 내렸다. 까만 머리 하나를 백골단 하얀 ‘화이바’가 우- 둘러싸고 두들겨 패는 걸 보며 당시 여자 친구이던 옆지기는 버스 안에서 울었다고. 서대문 경찰서로 끌려가서도 매타작이 이어졌는데 이틀 동안 정신없이 맞다가 “전화 좀 하자.”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국회의원이나 고위층에 ‘빽’이 있나 싶었는지 담당 경찰이 동전을 주고 공중전화 부스 옆을 지켰다. “걱정하지 마. 나 괜찮아.” 여자 친구에게 안부 한마디 전하고는 괜히 ‘쫄았던’ 경찰들에게 ‘뒤지게 더 맞았다.’는 이야기다.

“모르게 했죠.” 공대로 입학해서 미대로 편입한 것도, 학생운동을 하는 것도 부모님 모르게 했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지만 단 한 차례도 매를 든 적이 없는 아버지와 자상하고 헌신적인 어머니는 사실 알면서도 속아주는 느낌이었다. 졸업 전시 초대장으로 부모님을 청했을 때 어머니가 한 얘기는 “고생이 많았겠네, 우리 아들.” 정도였다.
졸업과 유학 후 여러 연고가 있는 동네를 거쳤다. 성미산마을에 온 까닭은 ‘몸통만 한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아이의 모습 대신 대안 교육을 모색하고 싶어서였다. “아무것도 없드만.” 성미산학교 설명회를 듣고는 이미 지어져 있는 줄 알고 왔다가 같이 만드는 일부터 했다.

옆지기는 보고 베끼는 건 잘 할 수 있는데 안 보고 만들어내는 건 못하겠다며 미술을 접고 직장에 다녔고, 이 작가는 돈 안 되는 그림 쪽을 선택해 살았다. “안 팔린 적도 없었고, 대박이 나서 팔린 적도 없었고 그렇습니다.” 매월 일정 생활비를 가져다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집안 대소사는 그림을 팔아서 해결할 수 있었다. 5년 정도 한 대학에 강의를 다닐 때는 제자들과 ‘방과 후 수업’으로 예술과 술의 진정성 토론을 하느라 술을 퍼마신 날이 많았다. 당시 옆지기는 “그 학교는 월급을 안 줘?” 진정 궁금해하기도 했다.
오전까지 남아있는 제자들과 ‘첫 차 클럽’을 형성하기도 하며 재밌었지만, 그 시기 포트폴리오 작업이 거의 없었다. 파벌과 학벌 위주의 세계에서 아웃사이더 느낌도 들었다. 그 5년 여 시기를 극복하는데 5년 정도 걸렸다. “여태 봤던 이상선 작업 중에 최고다.” “독일에서 막 왔던 시기 색깔들이 나오네.” 최근 작업의 전시장에서 접한 평가다. 이제 겨우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요즘 특이사항으로 살이 좀 빠졌다. 양성 종양으로 수술과 시술을 거쳤는데 살까지 7kg 빠졌다. 여기저기 염증도 올라와서 정밀 검진도 받았다. 결과는 이상 없음. 어디가 아픈가 싶었는데 주치의와 같은, 마을의 의료사협 원장은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건 술을 안 먹어서다.”라고 진단했다. 쿵짝이 맞아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술을 마시던 마을 지인이 당뇨로 술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 한몫한 듯하다. 
그런데 바닷가 시골 마을에 계신 어머니가 아프다. 어머니가 큰 병원으로 신장 투석을 다닐 상황이 되면 이 작가가 고향으로 가서 운전사 노릇을 하려고 한다. “나중에 엄마가 보고 싶을까 봐. 엄마 얼굴 실컷 보려고.” 효자라고 한마디 했더니 돌아가시면 많이 보고 싶을 거 같아서 지겹도록 보려고 한다고, ‘지극히 이기적인, 나 좋자고’ 하는 일이라고 한다. 누군가 달달한 포구라 일컬었다는 감포로 내려갈 생각을 해서인지 요즘 작품엔 바다가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신상 얘기며 작업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기보다 불친절할 수 있으나 그림으로 얘기하고 싶다는 이 작가. “산수화네.” 누군가 그림을 보고 그렇게 얘기하면 맞는 말이라 받는다. 산도 있고 물도 있으니 말이다. 현대미술 작가로 언론의 반응을 이용하라는 조언도 듣지만 “뭘. 굳이. 그렇게”라는 생각을 한다. 
텔레비전의 무슨 프로그램에서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한 10대 발레리나를 보면서 ‘아, 저 사람은 감동을 주는구나. 아, 그렇지 그림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줘야지.’ 싶었다. 그런 그림 하나 남기고픈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