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혁
박종혁은 환경에 관심이 많다. 사람이 사람과 서로 기대고 사람이 자연에 깃들길 바란다. 하여 자연이 스스로 그러할 수 있길 희망한다. 나무와 새 시리즈로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를 노래하기도 하고, 때론 버려진 비닐우산이며 사용한 비닐봉지를 다시 사용해 작품을 만들어서는 상품화되지 못하고 버려질 액자에 끼워 전시하기도 한다. 바닷물이며 수돗물에 녹아서 보이지 않을 때도 보일 때도 항상 있는 ‘그것’과 당신이나 당신의 자녀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이것’인 미세 플라스틱이 지배하는 세상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빠이의 꿈

박종혁 작가는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펜팔 친구로 맺어졌다. 아버지는 형을 낳은 뒤에야 군에 갔고 이후로도 가정에 책임지는 모습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형에 대한 기억은 때리고 심부름시키며 박 작가를 인간 리모컨으로 부리던 모습이다. 형이 누나를 때리는 걸 보면서 맞기 전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태권도 팬텀급 챔피언이기도 했던, 4살이나 나이 차이 나던 형에게 대들긴 어려웠다. 집에선 형에게 맞고 학교에선 선생님에게 맞았다. 가만히 있었는데 떠들기 시작하면 선생님이 뒤에 와 있는, 재수가 없는 학생이었다.

늘 맞던 박 작가는 살면서 딱 한 번 딱 한 대 때려봤다. 군에서였는데 조직이 잘 굴러가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했지만 손쉽게 그런 방법을 쓴 걸 후회한다. ‘그 속 안에 있으며 그 속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었다. 어리숙하고 바보 같던 행동으로 떠올려지는 게 또 있다. 고2 때 친한 친구가 “전문대만 가도 500원만 있으면 종일 재밌게 놀 수 있대.”라고 말해서 고3 때 진학 공부를 시작했다. 또 돈이 많이 든다는 뜬소문 때문에 미대 진학을 포기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한번은 도서관에서 내려다보이는 약국에 갔다. ‘이거 차리고 그림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거 하려면 무슨 대학을 가야 하나요?”
“약학과를 나와야 하지만 졸업하면 남자들은 주로 제약회사로 가요.”
그럼 그림을 그릴 수 없겠구나 싶었다. 약학과의 꿈은 사라지고, 그저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학과로 진학했다.

93년 춘천에 있는 대학교 정보공학과에 입학해서 3학년 1학기까지 슈퍼컴퓨터를 다루는 걸 익혔다. 그런데 공부는 안 하고 그림만 그렸다. 집이 어려운데 어머니가 고생해서 보내준 학교에서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기도 했다. 다시 결심했다.
“미대에 가고 싶어요.”
“니가 벌어서 가거라.”
미대엔 바로 가지 못했다. 낙방하고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소리소리 질렀다. 미대에 가겠다는 고함이고 외침이었다. 지방에 있어서 어려운가 싶어서 홍대 앞으로 와서 공짜로 다닐 학원을 알아보았다. 

00학번으로 미대에 진학했다. 입시학원에서 사귄 친구와 2006년에 결혼했다. 돈을 벌어야 살 수 있으니 일 중심의 삶이었다. 전국에 체인점이 있는 베니건스나 할리스 같은 곳 매장에 그림 그리는 일을 했다. 일을 많이 했지만 더불어 값을 못 받을 때도 많아졌다. ‘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그림을 1년만 그려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그러다가 오른쪽 무릎 연골이 깨졌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과하게 운전하며 전국을 다니느라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3개월을 앉은뱅이로 살다가, 절뚝거리며 걷다가, 티 안 나게 걷기까지 3~4년이 걸렸다. 현장 가서 일해야 먹고 사는 사람인데 집에서 컴으로만 작업하고 후배들이 대신 일 나가는 동안 거래처는 다 사라졌고 벌어놓은 것도 다 까먹었다.
그사이 은평마을예술창작소 자원봉사를 하고 운영위원을 하면서 돈 버는 일 말고 다른 관심이 생겼다. 바로 환경과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었다. 어차피 일을 못 하니 돈 버는 것을 머리에서 지우고, 동료 작가들과 건물 계약 1년 한정의 ‘일년만 미슬관’이라는 대안 공간을 열었다. 10년 후 연구소와 함께 기후 변화 관련 쿨루프 작업과 최소한의 공기청정기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때다.

성미산마을로 이사한 건 2014년. 마을에서 별칭은 ‘빠이’다. 태국 빠이에 갔을 때 얻은 성찰이 커서 그렇다. 그동안은 완벽하지 않으면 용납하지 않았다. 자기검열이 커서 뭐든 창피하고, 잘못한 거 같고,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편이었다. 정답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 데 신경 쓰느라 사람을 대하기도 만나기도 힘들었다. 한데 빠이에선 다르게 다가왔다. 완제품이 아니게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다. 
“노래 못 부르고 기타 못 치는데 돈통을 가운데 두고 공연하더라고요.” 잘 만들어지고 완성도 높은 공연만 보다가 그런 공연을 보니 실망스럽고 이해가 안 갔다. “그렇지만 며칠 지나니 그 사람이 기다려지더라고요.”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훌륭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 우리도 완벽하지 않을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이라는 별칭을 짓고 많이 편해졌다. 특유의 소심함이 다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일만 하느라 작업도 못 했는데 그렇다고 부자가 돼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깨달음은 소중하다.

10년 정도 전부터 춘천민족미술인협회에 가입해서 1년에 1~2회 전시하고 있다. 협회 가입은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사람’의 권유 때문이다. 그이는 박 작가가 정보공학과에 다니던 시절 활동한 그림 동아리 선생님으로 만났다. 박 작가보다 1살 많을 뿐인 미대 휴학생이었는데 덕분에 미대 실기실에도 가볼 수 있었다. 태백 쪽으로 알바 가서 70만 원을 벌었다면서 그걸로 물감만 가득 사서 궤짝에 넣고는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웃는 모습을 보며 ‘나도 돈 없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돈과 그림 이 두 가지는 박 작가의 삶에 늘 엇갈리는 것이었다. 돈이 많이 들 것 같아서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돈벌이에 수월할 것 같은 전공을 선택했다가 늦었지만 미대로 갔고, 결혼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데 매진했지만 결국 그림에 대한 갈망을 놓을 순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40대에 사업에 부도를 내고 나 몰라라 도망을 갔어요.” 온 동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였지만 가족에겐 내내 ‘자기만 행복’한 사람이었던 아버지. 박 작가에겐 그런 아버지가 드리운 반면교사의 그림자가 있는 듯도 하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선 결혼을 한다는 것, 옆지기가 있고 자식이 생긴다는 것, 가족에게 무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이 3박자를 잊지 말자는 것 말이다. 두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크지만 “아빠, 엄마 행복한 얼굴 보면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조금 편하게도 생각해 본다.
“애들 부족하지 않게 건사하면서 1주일에 3일은 그림 그리고, 3일은 환경 관련한 일을 하고, 1일은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어요.” 열심히 그리고 열심히 활동하지만, 그것이 생활을 보장하지는 않는 현실.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거위의 꿈 아니 빠이의 꿈이 실현되는 세상. 한 번쯤 도래하겠지.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