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미정
배미정은 일상의 관계와 기억의 조각들이 놓여져 있는 장면들, 아직 해석되지 않은 추상의 조합인 세상, 그 비틀어진 틈을 풍경화로써 담아내는 작업을 한다. 2011년 < 스산한 기쁨 > 개인전을 시작으로 최근의 < 아는 여자 > 작업들은 모두 관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조금 더 내밀하고 구체적인 전달 방식으로 그동안 사랑해왔던 여자들의 일상적인 삶과 그들의 공간, 작가가 기억하고 바라보는 그들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그이를 만나러 가던 날.
작가 인터뷰라는 명확한 목적으로 만나려니 무언가 준비를 해야 했다.

새벽에 잠이 깨어 인터뷰 준비도 할 겸, 읽어보리라 사두었다가 막상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열어보지 못한 그이의 생애 첫 책 < 아는 여자 >를 펴 들었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까지 페북에 올리기에 그이의 글은 익숙하다고 생각했고, 책이 왔을 때 잠시 펼쳐 눈으로 휙 훑어볼 때는 그림과 글이 있는 감성적인 에세이인 줄만 알았다. 막상 읽고 나니 명치 끝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이가 만나왔던 여자들에 대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섬세한 기억과 흘려보내지 않은 마음이 책에 꾹꾹 눌러 담겨있었다.
 
‘아, 그동안 내가 보아온 그이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그토록 가깝게, 애처로우면서도 단단하게, 각자인 것 같지만 서로 연결되게 느껴졌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아는 여자’들은 어쩌면 평범하게 지나칠 수 있는 인물, 구멍 난 길, 이끼 낀 돌, 한 마리의 새가 되어 그림에 담겨있다. 무엇으로 표현되었던, 그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애쓰며 사랑하고 살아가는 존재이자 작가 자신이고, 우리들 자신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오롯이 자신으로만 사람이 될 순 없지’ 깨달음과 함께 살면서 스쳐 간 많은 다른 생애들과의 인연을 이처럼 응축된 상상력으로 잘 엮어서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운 배미정 작가의 그림이 전보다 더 깊은 위로로 다가온다.
 
배미정 작가를 처음 만난 곳은 4.16 세월호 참사 1주기 < 망각에 저항하기 >(2015) 추모 전시장이었다. 오프닝 행사 때 곁에 서 있던 이가 배 작가였고,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공간에 있어서였는지 모르지만 스치다 얽힌 시선에 서로 눈인사를 나누며 그렇게 알게 되었다. 찰나에 주고받은 시선이었지만, 그새 일 년의 시간을 보낸 유가족의 절절한 이야기가 낯선 틈을 쉽사리 비집고 들어왔던가 보다. 그날 간략한 인사, 뒤풀이로 이어진 자리를 거쳐 불과 만난 지 서너 시간 만에 제법 친밀감을 느끼며 헤어졌다. 그로부터 9년 동안 우리가 만났던 곳은 주로 전시장이었다. 그이의 전시가 열리면 발길이 자연스레 가게 되었는데, 아마도 어딘가 나/너/우리가 될 수 있는 여자들의 과거와 오늘과 미래와 닮은 삶들을 그의 그림에서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배미정 작가를 떠올리면 ‘보다, 배우다, 그리다’, 이 세 개의 동사가 떠오른다. 보고 배우고 그리는데 바지런하다. 그이의 말투나 웃음은 느릿하다고 해야 할까, 느긋하다고 해야 할까. 그에 비하면 그림에 대한 열정은 대단히 날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곳저곳 전시장에 출몰한 흔적과, 지난 1~2년 사이에는 수많은 전시를 통해 작품을 선보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보이는 기운보다 훨씬 많은 내공과 정성을 가진 사람이다 싶다.
 
곁에서 보기엔 너무 열심이다 싶게 작업을 하고 있는데도, 그이는 끊임없이 작업에 목마르다.
 
“작업만 하는 기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 번도 그런 기간은 없었거든요. 레지던시 같은 데 가서 작업만 온전하게 하는 시간 있으면 진짜 좋을 것 같아요. 한 번도 그렇게 못 해봤어요. 애(딸아이)가 어릴 때는 어려서 그렇고, 지금은 또 일(생계벌이)하고 겹치니까 그렇고. 일 안 하고 작업에만 올인하고. 그런 시간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업 작가. 맨날 일하기 싫어서 나 맨날 도망가고 싶어 하잖아요. 도망 못 가는데...”
도망가고 싶은데 못 간다고 하소연하지만, 내가 본 배 작가는 도망도 잘 간다. 전시장으로.
 
 
보다 - 휴식같이 보고, 열망으로 채운다
 
“전시회 진짜 많이 다니잖아요? 그림만 실컷 그리고 싶다면서.”

“네. 많이 다녀요. 나는 예술작품 보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만 좋아하고 다른 건 하나도 좋아하는 거 없어요. 놀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어요. 그냥 보는 게 너무 행복하고. 근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숙제처럼 하잖아요. 그러면 엄청 불행할 것 같아요. 노동이 되면. 나한테 그게 그냥 휴식인 거예요.... 전시 실컷 보고 작업만 하고 싶어요.”
 
이야기 내내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이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그 기쁨을 말할 뿐이고 현실은 전시장이 아닌데도 말이다. 결국 도돌이표, 작업 이야기다. 틈만 나면, 아니 틈을 내서 전시장으로 가는 도망은 그러니까 작업이 너무너무 고픈 그이의 열망이다.
 
 
배우다 - 스치는 소소한 일상에서 배우다
 
‘돌멩이를 목에 두른 새’
그이가 좋아하고 아껴서 사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도 팔지 않았던 그림이 작업실 벽면에 걸려 있다.
 
“얘를 내가 되게 아끼고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이게 꼭 저 같아요. 도림천을 자주 걸어 다니는데, 거기에 새가 많아요. 가마우지인 것도 같은 새가 저 멀리 있는데 돌탑으로 된 목을 가진 거예요. 그래서 너무 깜짝 놀라서 자세히 쳐다보는데 그게 반짝이는 빛의 흐름과 옆에 돌멩이가 순간적으로 합쳐져서 내가 착각을 한 거에요. 착각의 순간은 영 점 몇 초였지만 그냥 내겐 그 순간 그렇게 보였어요.”
 
< 아는 여자 > 시리즈에 보면 ‘안녕을 비는 절벽’이라는 그림이 있다. 오르기도 힘든 절벽에 정성을 비는 돌들이 올려져 있다. 몇 해 전 백령도에 간 적이 있는 배 작가는 그곳에서 아슬아슬한 절벽에 돌멩이를 올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릴 때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어요. 왜 돌에 기도를 할까. 근데 사람들이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기도밖에 할 게 없더라고요.”
 
그날 도림천 그 새의 목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올려 쌓은 돌탑처럼 보인 것은 아마 그이도 이미 사람들의 애타는 마음, 그런 게 모여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알아버려서일 게다. 그이는 이렇게 스치고 간 작은 일상에서 배운 것을 화폭에 채운다.
 
 
그리다 – 안녕을 빌고, 위로를 건네기 위해 그리다
 
예술가의 삶은 뭘까, 자못 심오한 질문을 해보았다.
 
“그러니까 사람을 살게 하는 거, 그것 같아요. 내가 한 어떤 작업을 보고 아주 사소한 것에서 어떤 사람이 약간의 힘을 받아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거나, 한순간을 살아갈 수 있잖아요. 나는 다른 이들의 작업을 봤을 때 그렇거든요. 내 작업도 위로가 되는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그이의 책 < 아는 여자 > 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내밀하고 사소한 순간을 기억에 새겨, 내가 사랑했던 혹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 몸속 어딘가에 보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말보다 빨리 빛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사소하고 내밀하지만 내 기억 속에 또렷이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순간들은 기억하고 ‘존재시키기’ 위해~~~”

배 작가의 그림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들을 보이게 함으로써 존재하도록 이끌고 있다. 사소한 순간, 스쳐 간 사람들을 그림에 담아내어 애도하고 기억하는 그녀의 작업이 앞으로 무엇을 더 ‘존재시키게’ 할지 궁금하다.
 
“나는 자기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막 잘 꾸려가며 사는 여자들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한 면모를 그리는 것 같아요. 포착해서. 그래서 주연 쌤(점원 루트의 본명)도 그릴 때가 있을지도 모르고. 같이 생활하고 보고 자란 사람들로 나는 이루어진 사람인 것 같거든요.”
 
그날이 언제 올까? 그이의 그림 어디선가 바로 나와 대면할 날이... 손꼽아 기다려본다. 어쩌면 이미 그이의 그림에서 만났을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