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순
김화순은 ‘가만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할 줄 아는 것도 그림밖에 없던 아이’였다. 87년 민주화 투쟁을 겪으며 대학가서 할 일 첫 번째로 ‘데모’를 꼽았던 그림 학도 화순에게 “그림으로도 데모할 수 있어.”라는 한 선배의 말을 들은 것은 막아 놓은 물꼬를 터준 셈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이는 사람 곁에 있는 화가가 되고 싶었고, 그이의 꿈대로 그리하고 있다. 그림을 넘어 현실의 실천으로, 여성을 넘어 온 인류로 수평의 연대를 그려나간다.
김화순 작가를 만나러 빛고을 광주로 가던 날은 가는 비가 내리던 늦여름이었다. 문화전당역에 내려서 광장 앞 출구로 나가자 저기서 서둘러 걸어오는 김화순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도 눈가와 입매에 담긴 환한 웃음이 보인다. 5월 어느 날에도 이곳에서 그이를 만났었는데, 그날도 그런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향해 잰걸음으로 왔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이는 이렇게 온몸으로 환대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인 듯하다.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던 꿈, 그림 그리는 사람

당찬 모습과 온화한 기운이 절묘하게 섞여서 상대에게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전해지는데, 정작 본인은 숫기 없고 차분한 성격에 오로지 잘하는 것은 그림밖에 없어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전남 함평 출신인 김화순 작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려서 오로지 화가가 꿈이었다. 운이 좋게도 그이가 사는 집 옆엔 미술부가 유명한 학다리 중고등학교가 있었고, 중학교에 가면 미술부원이 되리라 당연히 생각하고 지냈다. 하지만 숫기가 없어서 일주일째 점심시간마다 미술부실 앞까지는 가도 노크도 하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다가 오곤 했다. 그날도 문 앞에서 돌아서려는데 한 선배가 마침 나왔고 ‘왜 왔냐?’고 물었다. 그렇게 미술부원이 되어 중고등 시절을 보내며 그림만 신나게 그리고 살려고 했다. 

“그때까지 꿈은 전 세계를 유랑하면서 아름다운 곳은 다 내가 그리리라 하는 거였어요.”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던가. 작은 시골 마을에 살다 보니 문화생활을 할 곳을 찾아서 교회에 다녔다. 나름 진보적이던 교회였는데 어느 날은 그곳 청년들이 집회를 준비했다. 그때가 87년. 작은 동네에서 볼 수 없는 이례적인 일로, 벽보도 붙고, 내일이 바로 D-데이. 학교에서는 사거리에 나가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수줍음은 많아도 관심 있는 것은 끝까지 하고야 마는 김화순 작가는 어찌했겠는가.     

“학다리 사거리는 상상하시는 것보다 훨 작아요. 나가서 보니 전경 버스 한 대가 그 시골에 온 거예요. 저쪽에서 우리 교회 청년 7명이 스크럼을 짜고 오다가 모두 전경에게 붙잡혀가는 것을 보았죠.” 

당시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전남대 미대에 들어갔을 때, 신입생환영회에서 대학 와서 제일 하고 싶은 일을 묻는 말에 '데모'라고 적어 넣었다. 그때 한 선배가 다가와서 그이에게 말했다. “그림으로도 데모할 수 있어.” 이 말이 너무도 신기해서 되물었다. “그림으로 어떻게 데모를 해요?”

“어려운 형편에 대학을 보내줬으니 대학가서 장학금을 받으며 조신하게 살아야겠다. 단지 데모는 하고... 이게 가능하리라고 볼 정도로 소박한 생각을 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선배의 말은 너무 층격적이면서도, 반가운 말이었지요.”

그렇게 전남대 민중미술패 ‘신바람’에 들어갔고, 그길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전공은 서양화인데 ‘걸개그림 전공’이라고 말하고 다닐 만큼 대학 내내 걸개그림을 그리고 다녔다. 한 번도 화가의 꿈이 바뀐 적은 없었으나 김화순 작가 자신도 어린 시절에는 몰랐지만 당시에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예술에 있어서 최고의 스승이 현실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여성의 삶으로, 여성의 눈으로

열심히 그림으로 데모하던 그이의 이력을 훑어보니 1995년에서 2002년이 훅 건너뛰어 있기에 까닭을 물었다. 쉰 것은 아니었고 전시는 종종 참여했다고. 96년에 결혼해서 3년 터울로 아이 둘을 키우면서 열심히 하지 못하게 된 것도 있지만, 둘째를 임신한 어느 날 행사에 갔다가 누군가 다가와서 “너는 볼 때마다 배가 불러있다.”는 말이 비수처럼 꽂혀서 그 길로 발길을 끊고, 그림은 집 거실에서 그리며 온라인 전시 등으로 가끔씩 참여하며 지냈다. 

어떻게 다시 시작하게 되었나 묻자, 여성단체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2년쯤, 아이 유치원을 보내고 집에 오던 중 우편함에 꽂힌 지역신문을 보게 되었는데, 아이를 키우며 사는 여성들은 경험했을 세상에 대한 갈급증에 한 줄도 빼지 않고 읽어 내려가다 보니 그냥 지역신문이 아니더라고요. ‘얘네들 도대체 누구야?’ 궁금증이 확 일어났죠. 게다 신문 뒤에 풍물패 모집이란 글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길로 풍물패에 전화해서 들어갔고, 여기서 만난 이들과 효순이/미선이 촛불을 들고, 정치학교를 하고, 수련회 다니고, 광주에선 처음으로 여성영화제를 열며 다시 ‘신바람’ 나게 보냈다. 당시에 모인 이들 대부분 학생운동 꽤나 했으나, 대학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홀로 각개격파 하듯 살아오며 뭔가 맞지 않는 그 생활을 누구랑도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 친구들과 모이고서는 다들 자기 이야기를 미친 듯이 하고, 함께 엄청 많이 울면서 모임을 진행했지요. 그러면서도 너무 신났죠.”

여성영화제를 처음 시작하게 된 영상창작단 '틈'이란 이름도 이런 삶에서 비롯되었다. 다들 육아하는 사이사이 틈틈이 한다는 뜻에서 '틈'이라고 이름 붙였고, 아이들 재우고 밤 10시 넘어서 모여서 날을 새곤 했다.

그렇게 빠져서 하고 나니 너무 그림이 그리고파졌다. 그해가 바로 2014년. 그리고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춥고 허름하지만 작업실이 생겼고, 막 그림을 그리려던 순간 세월호 참사를 마주하게 되면서.

“그때까지 계속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공을 들이며 살았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나... 많이 힘들었고, 울었고, 살려고 내가 살려고... 세월호 활동을 시작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 없으니까.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세상이 이 모양이라니...”

다들 느꼈던 그 절망의 마음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그림에 매진했다. 하루는 전시 며칠을 남겨놓고 밤새 그림을 그리는데, 날이 샐 때까지 대성통곡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아마 사람들이 무서웠을 거예요. 새벽에 웬 여자가 우는 소리가 들리니까요.” 

방음도 안 되고 흔들거리는 허름한 골목 작업실에 김화순 작가의 울음이 가득했을 장면이 선연히 떠오른다.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세월호 참사만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세월호 참사 말고 다른 그림을 그리다니...' 상상할 수 없었다고.


붉은 바람 앞에 서다

2022년 김화순 작가 신작 그림의 제목이다. 

여성이다 보니까 당연히 여성의 시선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페미니즘 공부는 어려웠지만 해야만 했다. 걸개그림을 그리고 집단 창작을 하고 하는 방식에 남성적 방식이 많았다. 그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럼 페미니즘적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수평적 질서라고 생각했고, 이후론 ‘수평적인 질서는 그림에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이번에 전시하는 그림 ‘붉은 바람 앞에 서다’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여성들은 뒷모습이지만 결기가 느껴진다. 꼬불거리는 머리칼 하나에도 힘이 솟는 인상의 그림이다. 수동적인 피해자로 그려지는 여성의 이미지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이의 시선이 담겼다.  
이 그림 이전 2019년부터 그이의 그림엔 여성들이 중심이 되었다.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는 듯이 달밤에 깨춤을 추며 등장한 여성에서부터, 다양한 연령의 여성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는 그림까지... 어쩌면 그이의 수평적인 질서, 수평적인 연대가 담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인 듯하다. 

올해 5월에는 오월미술제를 준비하며 광주민미협 사무국장으로서 청년 작가들과 수평적 예술의 연대를 일궈가고 있다.

“누가 옳은 것이 아닌데도 우리 세대는 자꾸 청년세대를 평가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봐요. 우리는 늘 진심이고 청년세대는 아니고...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이... 세대가 다른 것이고, 그 친구들은 그것이 진심인 것이지요.”
그림을 넘어 현실의 실천으로, 여성을 넘어 온 인류로 수평의 연대를 그려가려는 그이의 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몹시 궁금하다. 왜냐하면 내가 만난 김화순 작가, 그이는 유연하고 겁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