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일
김천일은 거짓말을 잘하지도, 자신을 포장하지도 못하는 작가다. 그림 세계 역시도 투명하고도 분명하다. 민중미술 15년전(1994), 정의·화평 반파시스트 전승 50주년 국제미술전(1995), 해방 50년 역사미술전(1995), 동북아와 제3세계 미술전(1999), 리얼링전(2004), ‘06 코리아 통일미술제(2006), 세계 한민족 미술대축제(2018), 그 외 조국의 산하전, 민족미술전, 현장미술전, 두벌갈이전, 통일미술제, 리얼리즘전 등 함께한 단체전의 이름만 보아도 그러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성장의 눈을 틔우고

어릴 적 김천일 선생은 마을에 새로이 생겨난 단지의 양옥집 유리창마다 돌을 던져 깨뜨리고 도망치는가 하면, 수박이며 참외 서리를 하는 개구쟁이였다. 한편으론 조회 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는 게 부끄러워서 당번과 바꾸어 교실에 남는 수줍은 아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중앙 일간지 어린이 신문 주최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나무람만 듣던 장난꾸러기가 칭찬을 들으니 고무됐다. “큰 상 받으니 내가 재능이 있나 보다 착각에 빠진 거지.” 그림을 좋아하게 됐다. 가족 중에 그림 그리는 사람도 없고 따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다. 상을 받은 게 계기가 돼서 그림으로 인생의 중심축이 옮겨간 거다. 중학교 때는 주 1회 특별활동으로 그림을 선택했고, 고등학교 때는 당연히 미술반 활동을 했다.

요즘 초등생 사생대회 심사를 하다 보면 500~1,000명의 작품이 모두 거기서 거기다. 각자에게 맞는 칭찬은 하되 큰 상은 정말 조심해서 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수상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일이란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소질이 없는 게 아니라 접하고 공부할 기회가 없이 사는 거지.” 일반 학교의 학생 수가 많으니 미술 시간이 있다고 해도 한 학생당 실기 지도 시간은 거의 없는 셈이다. 시간을 투자하면 대개는 일정 정도 수준에 올라가기 마련인데 말이다. 

물론 잘 그린 그림과 감동까지 주는 그림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감동을 주는 그림. 그게 그림이고 예술이지.” 그림엔 철학이 녹아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못한 삶을 살면서 그리는 그림은 공식을 밟은 기교는 있을지언정 감동까진 주진 못한다, 말로 듣고만 그리는 게 아니라 관심 기울여 잘 알고 경험하며 그려야 디테일 전달이 가능하다. 이것이 김 선생의 지론이다.

“선생님은 거짓말도 안 하실 거 같아요.” 강직한 외골수 느낌이라 던진 질문인데 가끔 하는 거짓말이 있단다. “어, 그림 잘 풀리고 있어.” 하는 말이다. 그림은 재능이 있다고 막힘없이 늘 술술 풀려나오는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창작의 고통’이란 말이 있지 않을까 헤아려본다. 닥치는 대로 그리다 길이 열리고 풀리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니 그이에게 그림은 답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고행의 긴 여정이기도 한 셈이다.

김 선생의 작품 세계는 체제 비판적이다. 저항의 정신이 배어있는 그림은 삶의 궤적과 함께한다. 85년이던 대학 1학년 때 광주를 알게 됐다. 5월 앞두고 교내에서 광주 비디오, 사진, 대자보를 접하며 화도 나고 울화통도 터져서 ‘빠져들게 됐다.’ 86년엔 아시안 게임 반대 데모가 한창이었다. 살벌한 시절이었고, 백골단이 방패 들고 짱돌 던지며 학교 안까지 들어와 대형 유리창들을 깨뜨리고 쓰러진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며 점령군처럼 행세하던 때였다. 그걸 보면서 분노를 더욱 키웠다. 6월 항쟁이며 7, 8월 노동자 대투쟁의 시기엔 9월의 입대를 앞두고 휴학했던 시기라 ‘더 자유롭게 맨날 나가서’ 회현 쪽 대오에 결합했다.

하지만 맹호부대로 불리는 기계화 사단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는 올림픽 반대 데모를 진압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한여름 땡볕에 방독면 쓰고 훈련하고 새벽 집합을 하던 시절이었다. 동료들이 ‘니들 때문에 개고생한다’며 데모대에 폭발시킬 분노를 쌓아가는 시간이 김 선생에겐 ‘막상 진압이 결정되면 난 탈영해야 하나.’ 고민하는, ‘내 마음은 지옥’의 시간이었다.

제대 후 3학년에 복학하면서는 미술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좌고우면할 것 없는 굳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92년 2월 졸업 후 3월부터 민미협 산하 노동미술위원회 활동을 했다. 사실 조금 더 ‘왼쪽’인 단체에서 활동하려 했는데 그 단체가 마침 해산한 까닭이었다. 4.9통일평화재단과 인혁당 사건 사법살인 현장인 서대문 형무소에서 전시도 하며 다양한 활동을 쌓은 김 선생은 ‘그림 쪽의 장의사’이기도 하다. 의로운 민주화 인사의 예고 없는 죽음에 당면해서 삼일장 안에 그림을 그려내곤 해서다.

김 선생은 초등학교 때 상을 받은 이후부터 그림이라는 한 길만을 보고 살아온 자세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알게 된 세상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살아왔다. “예전엔 끝까지 우겼겠지.” 변함은 없되 변화가 있다면 요즘은 군인 출신 보수적인 아버지와 논쟁하기보다 자신의 의견만 밝힐 뿐이란 거다. ‘세상엔 안되는 게 있구나, 득 될 게 없구나, 차선도 있구나.’ 나름 성찰한다. “어느 날 뚝딱 온 변화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온 변화지.” 그림을 안 그렸으면 ‘꼴통’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자평하는 김 선생. 벽화며 걸개며 단체 작업을 하면서 고집부린다고, 주장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오랜 세월 오랜 관계 속에 이제는 갈등 없이 공동 작업으로 한 점 그림을 완성해내는 것이 가능해진 것도 같은 이치다.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고 생각했다가 광주를, 현실을, 세상을 보게 됐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성장의 눈을 틔우고 한결같이 살았다. “현실에 관심 없다는 게 어떻게 예술이야?”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예술이 나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지.” 김 선생은 그림으로 동시대를 호흡하며 또 그림에서 희망을 얻는다. 붓을 놓지 않는 한 현실과 노동이란 화두 역시 놓지 않을 사람이다.

김 선생의 작업실은 깔끔했다. 정돈된 작업실, 붉디붉은 쇳물이 뜨겁다 못해 노랗고 흰빛으로 산화하는 용광로 그림, 그 안에 붉디붉은 마음으로 하얗게 산화하며 불티의 삶을 사는 김 선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