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경
서수경은 낡은 것과 늙은 사람에도 따듯한 시선을 보낸다. 구석진 곳의 버려진 거울도 그이의 작품에선 소중하게 빛난다. 고달프고 고단하지만 살아가는 일의 거룩함, 작고 초라하지만 정직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숭고한 품위를 그려낸다. 그림 속 뒷모습에서도 웅덩이에 비친 모습에서도 그 애잔하고 잔잔한 사랑을 읽어낼 수 있다. 징검다리 미술가게를 시작할 때 했던 그이의 말이 인상적이다. “내 그림을 노동자와 서민의 가슴으로 띄워 보낼 수 있다면 내 그림 그리기가 더 행복해지겠다.”
* 작가 노트

3회 개인전(2021년) - 살아간다
 
5년간의 그림이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적잖은 굴곡과 변화가 보인다. 시선의 방향이 밖에서 안으로 바뀐 것도 그 변화 중 하나이다.
 
낡은 창에 담긴 삶의 풍경. 좁은 틈바구니를 터전으로 삼은 작은 풀꽃들과 마을에서 만난 이웃의 뒷모습. 곳곳의 빛들과 웅덩이에 담긴 하늘. ‘살아가는 일’의 거룩함을 경험한 시간이 내게 새로이 열어준 길에서 만난 장면들이다. 끝 모를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눈이 환해지는 순간들이다. ‘생을 온전히 받아낸 존재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조각’을 무딘 붓질로 담겠다고 애써보는 시간 속에 있다.
 
불안과 욕망으로 침침해진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래도록 나의 눈이 침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이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만큼 불안과 욕망을 부추겨 공동체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에 대한 반대와 노여움도 단단해진다.
 
타인의 수고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 본 적 없는 정직한 삶만이 지닐 수 있는 단단한 아름다움. 난 그 아름다움에 눈 밝은 화가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그림 그리기를 방편으로 삼아 침침한 눈을 열심히 닦고 싶다. (2021. 초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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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을 한집에 살았다. 겨울 이사를 준비하며 마을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한다. 이 집에 살며 했던 세 번의 개인전 도록을 뒤적여 그때 썼던 작가 노트의 일부를 함께 싣는다. 어릴 적 학교 친구들이 일기장을 함께 쓰는 것을 보고 느꼈던 그 낯선 기분이 생생하다. 아주 친한 사이였거나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했던 일이었겠지... 나도 비슷한 마음이다.

... 금가고 얼룩진 벽들은 희미한 어둠에 묻히고, 창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다. 창 안의 삶을 헤아리며 실없이 웃기도 하고 찔끔거리기도 한다. 힘을 다해 애썼으나 내내 고단한 이들을 본다. 그들의 아름다움과 품위에 대해 생각한다. 훼손되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것. 그것을 작업으로 담고 싶다...
2018. < 매듭의 시작 > 작가 노트
 
 
2회 개인전(2016년) - 그 마음
 
1.
‘삶의 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회 현실에 대해서도 좀 더 가까이 다가서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첫 개인전 직후, 작업실에서 전시 짐 정리하면서였다. 5년 전의 일이다.
 
첫 전시 때, 많은 사람이 말을 건넸고,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했다.
그림 앞에 서서 ‘나도 이런 마음을 안다고, 당신도 그랬냐고... 언제 무슨 일로 그랬냐고...’
난 얼떨떨했다. 대부분 나 자신 안에 갇힌 일기 같은 그림들이었고, 그러한 그림을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펼쳐 보인다는 일이 어쩐지 어색해서 쭈뼛쭈뼛하고 있던 터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나, 혼자서 그린 그림이 관객을 만나면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체험’에 용기도 얻었고, 조금 고무되기도 했었다. 그런 끝에 했던 다짐이었다.
 
2.
5년이 지났다. 그때의 다짐을 떠올리니 머쓱하다.
나의 일상은 어수선했고, 삶과 작업에 대한 태도 또한 갈팡질팡했다.
그런데 또 이렇게 그림들이 남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고, 그림들은 그것이 그려졌던 그 시간 속에 서서 내게 묻는 듯하다.
‘이 마음들을 기억하느냐’고. 저만치에 있는 그림들이 여기에 있는 내게 말을 건다.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무겁게 되돌아보게 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루가 멀다고 마음을 쿵쿵 치는 일들이 전해진다. 그 마음들을 깊이 들여다볼 틈도 없이 또 다른 절망감과 슬픔이 먼저의 그것들을 밀어낸다. 마음에 굳은살이 박이는 듯하다.
 
곳곳에 자신을 건 싸움을 하는 이들이 있다. 마땅히 함께해야 하는 싸움을 오롯이 감당하고 있는 이들. 그네들의 힘겨움과 고단함. 그 마음들.
난 멀리 있는 구경꾼 같다.
그림을 그리며, 그 마음들을 헤아려보려 했지만, 번번이 아득해지기만 했다.
 
이런저런 마음의 불편함을 안고 그간의 그림들을 한자리에 펼쳐 보이는 자리를 만들게 되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의 세세하고 소소한 과정. 하나둘 늘어나는 그림들. 그리고 그것들과 내가 맺는 관계를 곰곰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고 싶다. 점점 더 어렵게만 느껴진다.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기꺼이 흔들려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1회 개인전(2010) - 어떤 쓸쓸함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것들을 그렸다.
어떤 공간, 사람, 상황, 그리고 그것을 마주한 나의 마음들...
무엇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던가.
마음이 가 닿았던 것들. 스치듯 보았으나 마음을 떠나지 않고 오래 남아 있었던 것들.
 
명절 직전 쇼핑 봉투를 잔뜩 들고 흥얼흥얼 길을 걷는 사람.
내가 사는 동네에 가로등이 탁 켜지던 순간.
눈 덮인 산에서 만난 엷은 서러움.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과 감사를 알수록 아픔에도 민감해진다. 애써 살았으나 삶의 고달픔에 힘겨워하는 이들, 만만치 않을 삶의 길목에 서 있는 이들. 변두리 마을의 모습들.
 
세상이 무엇으로 지탱되고, 그나마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다. 힘없고, 낮은 곳의 사람들이 지닌 그 품위와 강인함을 알고 있다. 그 아름다움을 그 아름다움과 품위를 훼손하는 세상의 질서에 대한 노여움이 내게서 옅어졌다고 느끼는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괜히 서성이며 불안했다. 작업을 하며 가장 힘겨웠던 것도 그것이다.
 
오래전, 내가 스물한 살 때, 열다섯 살쯤이던 한 야학 학생의 뒷모습을 보며, 노여워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미싱 바늘에 찔려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을 한 채 수업을 받고는 밤늦게 공장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무엇이었을까? 그때의 내 마음은.
그 마음은 지나간 시간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 남아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 그림들은 그 마음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