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일
이선일은 현재 서울성곽 근처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그가 발 딛고 머물고 있는 곳의 사람살이를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개인전으로 ‘오름짓’,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 그리고 ‘덜 미학적인 더 인간적인-스스로 풍경이 된 마을’에서 드러나듯, 그는 ‘가만히 있으라’ 요구하는 세상을 향해 자생적이며 꿈틀대는 저항적 사람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에 담고자 하고 있다.
* 창신동 작업실에 마주 앉았다. 담배를 물고 있는 까마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자연스레 까마귀와 담배의 의미를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까마귀는 이선일 선생에게 길조니 흉조니를 떠나 친구 같은 존재다. 평일이나 날씨가 궂은 날처럼 사람이 붐비지 않는 산 혹은 사람들이 내려가 버린 빈산에서 위로를 주는 반가운 친구다. 담배 역시 구석에서 몰래 피는 청소년의 담배처럼 위로의 상징물이다.
 
검은 나무로 서서 검은 까마귀, 한 줄기 흰 연기로 세상에 주는 위로 한 점
 
‘새는 저를 잡지 않는 사람의 손 위에 내려앉는다’라는 그림의 제목이 예사롭지 않은데 역시나 학창 시절 백일장에 나가 곧잘 상을 받곤 했단다. 중2 때 쓴 ‘검은 나무’라는 글을 보고는 국어 선생님이 여러 차례 “니가 쓴 거냐?” 묻고는 “너는 글을 써라.” 당부한 경험도 있다. 고등학생 때는 그 당부대로 글을 쓰되 연애편지 대필을 하곤 했다. 의뢰를 받으며 떡볶이 한 접시, 다 써서 넘기며 라면 한 냄비 식이었다.
특별활동으론 사진반에서 사진을 찍었다. 보성고 사진반 하면 지금도 알아주는데 대학 수업처럼 암실에서 릴 감기도 하며 사진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사진반 난로를 보며 혼자 불멍하는 시간이 좋았고, 암실에서 나오면 어느새 어두워져 텅 빈 교정의 내밀함이 좋았다. ‘세상과 나 사이 빈 공간, 빈 시간 아까워 천천히 걷던’ 날이었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사진기 셔터 소리와 필름 감기는 소리의 매력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얘기를 듣다가 대체 그림은 언제부터 그린 거였을까 궁금해졌다.
“초등 중등 미술반만 주구장창 했어요. 지겨워서, 너무 익숙해서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던 거죠.”
“미술반은 왜 들어갔던 건데요?”
“제일 잘 했던 거라서요.”
“아~”
어린 날의 선일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엄마가 선물로 주던 분필로 온 동네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간혹 붉은색이나 푸른색 분필을 받은 날은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특별한 날 도화지나 크레파스를 받으면 그날 다 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청소년기의 선일은 수학도 특출하게 잘 했다. 외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수학 선생님인 까닭이었을까. 외우는 과목이나 다른 공부는 ‘어차피 안 했고’ 산수는 덤벙거리다 틀려도 수학 문제는 들여다보면 풀이 방식이 보였다.
 
이과생이었고 일탈이래야 친구들이 다 피워서 함께 몰래 핀 담배 정도가 전부. 시간 약속은 물론 정해진 날에 받기로 한 모든 것을 딱딱 내놓는 완벽함에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영예의 블랙리스트 작가인 그이의 ‘반사회성’은 또 언제 키워진 걸까.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이런 노래가 있잖아요. 걷다 보니까 거기 있는 느낌이었죠.”
‘이 길’에는 산이 처음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산에 가자고 했다. 연애편지 대필의 첫 의뢰인인 친구였다. 아무 준비도 없이 평상복을 입고 갔다. 폭풍이 와서 대피령이 내려지고 모두가 내려오고 있는데 올라갔던 지리산이었다. 친구는 ‘죽을 때까지 산에 가지 않겠다’ 다짐을 하던 날이 이 선생에겐 ‘죽을 때까지 산에 갈 거 같다’ 예감한 날이었다.
 
걷다 보면 암벽이 나오고, 그러면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자연스러운 일이던 것처럼 한국등산학교에 갔고, 서울시 산악연맹 산악조난구조대에 참가했다. 정복하는 등정주의보다는 자연 존중의 과정을 중시하는 등로주의 등반이 좋다는 이 선생의 말에 등반은 왠지 동반 같아서 더 푸근한 느낌이 든다며 맞장구쳤다.
그저 산이 좋았는데 산에서 내려오면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컴퓨터, 드라마, 이성 친구 이야기에 열심인 주위 사람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만 같았다. 이 선생의 사회적 발언 그 시작은 사패산에 터널을 뚫으려는 시도 앞에서였다. 산이 좋아서 산에 가는 산악인들도 당연히 반대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선배들과 멀어진 계기가 됐다.
인권연구소 창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평생 두 번 자발적으로 어딘가에 소속한 적이 있는데 하나가 산악연맹이고 다른 하나가 인권단체인 셈이다. 이론이 없으니까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권 관련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인권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란 책에 그림 작가로도 참여했다.
 
차별금지법은 제정해야 하고, 국가보안법은 폐지해야 한다는 이 선생. 다른 인터뷰 글을 보니 ‘작가에겐 100%의 자유가 필수적이다. 99%의 자유란 없다’는 주장이다. '다른 것은 해도 된다, 이것은 하지 말고'는 이미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평등해야 비로소 평등이다. 소수자를 혐오하고 공격하고 핍박하면서 평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도 중요한 열매도 없는 바람을 노래 삼아 묵묵히 한 인생을 살아가는 더 검어질래야 더 검어질 수 없는 까만 나무이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경험을 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이 세상 사람의 인생을 모두 산 그런 깊은 나무, 세상에서 어떤 나무보다 그런 묵직한 검은 나무가 되겠습니다’ 중2의 다짐 그대로 ‘검은 나무’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슬쩍 엿듣고, 그이가 좋아하는 산 같고 바위 같은 모습 또한 슬쩍 엿본 느낌이었다.
요즘 작품 관련 관심사를 물으니 그동안 좁은 곳에서도 가능한 평면작업 위주였는데 입체작업의 욕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설치작업과 조형작업도 다시 하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다. 목공을 했다 하면 집을 고치고, 수영을 했다 하면 강사를 하고, 산을 탔다 하면 구조대를 하는 다재다능 팔방미인 이 선생의 이후 작업은 어떤 형식으로 펼쳐질지 궁금 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