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한해 전 오늘이었어요. 2021년 2월 7일이었죠. 부산에서부터 400km 넘는 길을 걸어 김진숙과 희망뚜벅이가 청와대 광장으로 진격해 온 날이요. 2020년 12월 19일 김진숙 쾌유와 복직을 바라는 리멤버 희망버스가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로 향했었죠. 승객이었던 시민과 노동자는 돌아오자마자 복직촉구 농성을 모색했어요. 12월 22일부터 청와대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네요. 김진숙의 부당해고는 국가폭력이 개입한 것이니 국가가 사과하고, 청와대가 나서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었죠. 단식농성 소식을 접한 김진숙도 암이 재발한 병자의 몸을 던져 한파를 뚫고 청와대까지 휘몰아쳐 왔더랬죠.
희망뚜벅이가 광장으로 오는 발걸음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광장을 지킨 사람들. 연대자는 다양하고도 알차게 광장을 채웠어요. ‘릴레이 3000배 절투쟁’으로 절을 하고, ‘속 터진 가수들’은 ‘청와대 민주버스킹 1시의 희망곡’에서 노래하고, ‘유쾌한 2시’에선 몸펴기 생활운동도 하고, 글쓰기도 익히고, 사람책도 읽고, 시도 낭송하고, 타로도 보면서 말이죠.
’제대로 된 세상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들‘ 주관으론 ‘대통령이 책임져라! 청와대 드로잉전’을 했어요. 화가들은 광장으로 와서 곱아드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죠.
천막은커녕 비닐 한 장 치지 못하게 해서 산바람이 맹위를 떨치는 공간. 장갑과 목도리와 마스크와 모자로 무장해도 떨리고 시린 시간. 얼어붙을 듯한 바람 속에 기꺼이 맨손가락 내어 펜을 쥐고 붓을 들었던 ‘궁정 화가들’이 빚어낸, 극강 추위 속의 ‘극한미술관’을 잊기란 어려운 일이에요.
1월 10일 극한미술관 개관식은 신학철, 임옥상 선생님의 특별 출연과 김민희, 김용민, 김천일, 박은태, 박종혁, 배미정, 서수경, 이동수, 이선일, 이윤엽, 장경호, 전지, 정윤희, 최민, 최애경, 한선주, 황양희 등 참여 작가의 그림 한 점 한 점이 광장에서 별처럼 빛나는 자리였어요.
거리의 화가 첫 타자였던 박은태 선생님과 옆지기인 서수경 선생님은 극한미술관의 ‘관장’으로 2월 7일 폐관까지 내내 관리를 도맡았고요.
한파주의보가 내려지는 날들이었지만 청와대발 무관심 한파가 가장 강력했어요. 무책임, 무능력, 무성의, 무신경, 무대응, 무대책으로 일관했거든요. 동장군으로 군림하는 이들이 통치하는 동토의 겨울왕국은 촛불항쟁 이후에도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김진숙을 대공분실로 잡아가 두드려 패며 해고한 전두환 군사정권이나 나는 책임이 없다, 눈 감고, 노사 간의 문제다, 등 돌린 정권이나 말이죠. 뒷간에 갈 적 맘 다르고 올 적 맘 다르듯이, 되기 전인 비포와 된 후의 애프터가 다른 게 무엇인지 생생 체험했어요. 인권을 얼려 죽이고 노동권을 굶겨 죽이는 현장이었다 말하면 너무 심한 말이 될까요.
김진숙은 ‘부당해고이니 끝까지 싸워 복직하라’던, 한때는 동지였던 이에게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구중궁궐 안의 옛 동지는 문 활짝 열어 맞이하기는커녕 문전박대로 만나주지조차 않았지만. 김진숙과 희망뚜벅이는 걸음마다 희망의 씨앗을 뿌렸어요.
한진, 쌍차, 대우버스, 게이츠, 코레일네트웍스, 아시아나케이오, 엘지트윈타워, 아사히, 서진이앤지... 고용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와 해고노동자가 서로 의지하며 걸었죠. 아픔이 아픔을 위로하며 말이에요.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으며 말이에요.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며 우리의 내일을 열어가는 걸음으로 세상에 던진 파문의 동그라미는 겹겹이 커지고 넓어지며 파장을 불러올 거라고, 남쪽에서부터 몰아왔던 봄바람에 희망의 씨앗이 싹이 틀 거라고, 우리에게 봄이 올 거라고 속삭이고 싶어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처럼 우리는 승리할 때까지 싸울 테니까요. 김진숙의 봄, 노동의 봄이 올 때까지,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이 올 때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할 테니까요.
방사선 치료도 마다하고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 있게 살겠다고 걸어온 그 걸음은,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하는 그이의 삶은, 바로 지지 않는 정신이겠죠. 패배와 후퇴를 모르고 포기와 타협을 않으며 굴종과 굴복을 거부하는 빛나는 인간 정신이겠죠.
노동과 예술의 가교가 되려 하는 징검다리 미술가게는 비인간의 자본주의 시대에서 인간 정신으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전사 김진숙들을 생각하며 극강의 ‘극한미술전’으로 시작해요. 그림 판매액의 절반은 작가분의 후원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김진숙 복직투쟁 기금에 보태도록 할 거예요. 띄워 보내는 절절한 그림과 절실한 이야기가 가슴으로 가닿기를 바라요.
타이밍이라는 약이 지금도 있나 모르겠습니다.
커피도 박카스도 귀하던 시절. 내가 지금 먹고 있는 항암제처럼 작고 하얀 타이밍 한 알을 사 먹고 곱빼기 철야를 일주일씩 하곤 했죠. 곱빼기 철야는 자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밥시간 15분 빼곤 쭉 이어서 일을 하는 거죠.
선적이 바쁘거나 클레임이 걸리면 출근도 퇴근도 없이 일주일씩. 타이밍을 먹으면 눈 뜨고 자요. 그러다 보면 지 손가락에 미싱 바늘을 박기도 하는데. 미싱 바늘이 부러졌다고. 원단에 피가 튀었다고 원단으로 따귀를 맞던 아이들.
그런 삶이 지겹고 힘들어서 동거생활을 하거나 결혼을 한 아이들은 더 지겹고 힘겨운 삶을 살게 되죠, 대부분.
18살에 들어간 큰 공장엔 임미경들. 신순애·이숙희·조미자·박해숙들이 참 많았습니다. 18살은 많은 나이였습니다. 대부분 13살 14살. 공장에 와서 첫 생리를 하던 아이들. 취업도 안 되는 나이라 남의 주민증으로 위장취업을 했던 아이들.
라벨의 영어를 몰라 자꾸 불량을 내니 오더가 바뀔 때마다 소등한 기숙사 방을 나와 가로등 불빛이 비추던 공장 옥상에서 라벨의 영어를 연필에 침 묻혀가며 그려서 외우던 아이들.
‘미싱타는 여자들’에서 임미경은 14살에 노동교실을 지키려다 감옥을 가는데 14살은 소년원으로 가야 하는 나이이니 경찰서에서 나이를 16살로 위조해 구치소로 보냅니다.
글도 가르쳐주고 저금하는 법도 가르쳐주던 노동교실이 왜 그렇게 목숨까지 걸고 지켜야 할 만큼 소중했을까요.
내가 다녔던 야학. 그곳에서 처음 들었던 존댓말.
생산량을 못 채웠다고. 불량을 냈다고. 행동이 빠릿빠릿하지 못하다고 욕하고 윽박지르고 때리는 말들이 아니라 진숙 씨, 어서 오이소. 오늘은 어데 안 다쳤어요? 미싱이나 원단이 아니라 나를 걱정해주고 물어주던 다정하고 상냥한 말들.
뭘 좋아하는지. 무슨 책을 좋아하는지 묻던 첫 사람들. ‘인간답게’를 가르쳐준 사람들.
몇 년 전 어느 행사에서 이름만 들었던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석정남 선배를 만난 적이 있어요. 노조에 막 눈뜨던 무렵. 그분이 쓰셨던 책을 돌려 읽으며 마음속에 참 크게 자리했던 분. 남편이랑 같이 오셨는데 남편이 자기가 그런 활동을 한 걸 잘 모르신단 거예요. 집에 자기가 쓴 책이 한 권도 없고.
노동자 중엔 그런 사람 많아요. 임미경처럼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과거’를 한처럼 묻은 채 사는 사람들. 누군가는 그런 과거가 자랑이 되고 정치적 자산이 되어 권력이 되는 보증수표가 되는데 노동자들에겐 특히 여성 노동자들에겐 숨기고 감춰야 하는 현실.
제가 재작년 복직투쟁을 다시 시작하면서 나의 복직은 시대의 복직이라는 건방진 얘기를 했습니다.
공장이 아예 없어져 복직투쟁조차 할 대상이 없는 수많은 해고 노동자들. 동일방직, 청계피복, YH,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구로공단의 수많은...
그리고 풍영화성, 삼화고무, 진양고무, 동양고무, 국제상사, 화승산업, 화성실업, 수많은 부산의 신발공장들과 풍산금속.
작년에 청와대까지 희망뚜벅이 할 때도 그 노동자들이 함께 걸었습니다. 동일방직 선배들이 오신 날. 제대로 인사도 못 했습니다. 걷다가 울까 봐.
노동교실 지키겠다고 투쟁한 날이 9월 9일이라고 북한의 노동당 창당 일에 맞춘 거 아니냐고 조사를 받고 그렇게 빨갱이가 되고 구속되고 해고됐던 시절.
노조 대의원에 당선되고 대의원대회 다녀온 보고서를 유인물로 뿌렸다고 아버지가 이북 사람이라는 것과 연결되던 미친 시대.
그런 세상에서 우린 얼마나 멀어졌을까요.
해고된 채 환갑이 지나고 칠순이 된 채 늙어가는 노동자들. 복직이 생애 마지막 염원이 된 내가 37년을 해고 노동자로 남아있는데.
희망뚜벅이가 1년이 지났네요.
내 생애 가장 추웠던 겨울은 크레인과 작년입니다. 맞바람에 콧물, 눈물은 쉴 새 없이 줄줄 흐르는데 몸에선 땀이 흐르게 바삐 걸었죠. 단식의 고통을 알기에 하루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 비와 겨울 삭풍을 고스란히 맞고 단식을 하고 절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며 노동자의 자리를 지켰던 분들.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복직하는 날. 다 같이 모여서 밥 먹어요, 우리.
A4 내외 크기로 현장을 담아낸 생생한 소품들입니다.
극한 추위 속 뜨거운 마음 담아 맨손으로 그려낸 작품의 비용은
3만 7천 원 이상으로 포장과 배송비 고려 자율 책정입니다.
김진숙 동지 37년 해고자 세월을 담은 금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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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 *
청와대 분수대 앞에 서서 — 2021년 1월
우리가 바꿨다, 사람들 흩어졌는데,
난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세상,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거리다,
미루나무 그림자에 발목 잡혀 서 있기도 잠시...
눈이 내린다.
시민사회수석도 활동가 출신이라던데,
떳떳하던 그 열망은 어디로 갔는지.
온몸이 젖어 더운 피까지 얼려도,
청와대 앞에선 한 장의 비닐조차 겁박 거리.
그림을 누가 붓으로 그린다 는가?
곡기 끊어 까매진 이마 그리려니 목이 타 온다.
21년 1월의 기억 — 2022년 1월
그때는, 빳빳하게 얼어서
옷자락도 채 못 그리고 이젤을 접었지만...
지금도 청와대 분수대 앞 풍경을
깃털 속에 품고 있어요.
날카로운 겨울 기타 줄을 튕기던
손가락
무심한 눈밭으로
애타게 절하던 무릎
곡기와 곡기 사이에
십 며칠 째 앉아 있는 어깨
그렇게 들을 수 있어요.
가슴 위로 눈발 휘날려 얼어붙어도
이내 까맣게 태우던 그 소리...
‘존엄은 지지 않는다.’
작가의 말 *
검은 나무로 서서 검은 까마귀, 한 줄기 흰 연기로 세상에 주는 위로 한 점
창신동 작업실에 마주 앉았다. 담배를 물고 있는 까마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자연스레 까마귀와 담배의 의미를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까마귀는 선일 작가에게 길조니 흉조니를 떠나 친구 같은 존재다. 평일이나 날씨가 궂은 날처럼 사람이 붐비지 않는 산 혹은 사람들이 내려가 버린 빈산에서 위로를 주는 반가운 친구다. 담배 역시 구석에서 몰래 피는 청소년의 담배처럼 위로의 상징물이다.
‘새는 저를 잡지 않는 사람의 손 위에 내려앉는다’라는 그림의 제목이 예사롭지 않은데 역시나 학창 시절 백일장에 나가 곧잘 상을 받곤 했단다. 중2 때 쓴 ‘검은 나무’라는 글을 보고는 국어 선생님이 여러 차례 “니가 쓴 거냐?” 묻고는 “너는 글을 써라.” 당부한 경험도 있다. 고등학생 때는 그 당부대로 글을 쓰되 연애편지 대필을 하곤 했다. 의뢰를 받으며 떡볶이 한 접시, 다 써서 넘기면서 라면 한 냄비 식이었다.
특별활동으론 사진반에서 사진을 찍었다. 보성고 사진반 하면 지금도 알아주는데 대학 수업처럼 암실에서 릴 감기도 하며 사진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사진반 난로를 보며 혼자 불멍하는 시간이 좋았고, 암실에서 나오면 어느새 어두워져 텅 빈 교정의 내밀함이 좋았다. ‘세상과 나 사이 빈 공간, 빈 시간 아까워 천천히 걷던’ 날이었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사진기 셔터 소리와 필름 감기는 소리의 매력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얘기를 듣다가 대체 그림은 언제부터 그린 거였을까 궁금해졌다.
“초등 중등 미술반만 주구장창 했어요. 지겨워서, 너무 익숙해서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던 거죠.”
“미술반은 왜 들어갔던 건데요?”
“제일 잘 했던 거라서요.”
“아~”
어린 날의 선일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엄마가 선물로 주던 분필로 온 동네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간혹 붉은색이나 푸른색 분필을 받은 날은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특별한 날 도화지나 크레파스를 받으면 그날 다 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청소년기의 선일은 수학도 특출하게 잘 했다. 외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수학 선생님인 까닭이었을까. 외우는 과목이나 다른 공부는 ‘어차피 안 했고’ 산수는 덤벙거리다 틀려도 수학 문제는 들여다보면 풀이 방식이 보였다.
이과생이었고 일탈이래야 친구들이 다 피워서 몰래 핀 담배 정도가 전부. 시간 약속은 물론 정해진 날에 받기로 한 모든 것을 딱딱 내놓는 완벽함에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영예의 블랙리스트 작가인 그이의 ‘반사회성’은 또 언제 키워진 걸까.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이런 노래가 있잖아요. 걷다 보니까 거기 있는 느낌이었죠.”
‘이 길’에는 산이 처음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산에 가자고 했다. 연애편지 대필의 첫 의뢰인인 친구였다. 아무 준비도 없이 평상복을 입고 갔다. 폭풍이 와서 대피령이 내려지고 모두가 내려오고 있는데 올라갔던 지리산이었다. 친구는 ‘죽을 때까지 산에 가지 않겠다’ 다짐을 하던 날이 선일 작가에겐 ‘죽을 때까지 산에 갈 거 같다’ 예감한 날이었다.
걷다 보면 암벽이 나오고, 그러면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자연스러운 일이던 것처럼 한국등산학교에 갔고, 서울시 산악연맹 산악조난구조대에 참가했다. 정복하는 등정주의보다는 자연 존중의 과정을 중시하는 등로주의 등반이 좋다는 선일 작가의 말에 등반은 왠지 동반 같아서 더 푸근한 느낌이 든다며 맞장구쳤다.
그저 산이 좋았는데 산에서 내려오면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컴퓨터, 드라마, 이성 친구 이야기에 열심인 주위 사람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만 같았다. 선일 작가의 사회적 발언 그 시작은 사패산에 터널을 뚫으려는 시도 앞에서였다. 산이 좋아서 산에 가는 산악인들도 당연히 반대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선배들과 멀어진 계기가 됐다.
인권연구소 창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평생 두 번 자발적으로 어딘가에 소속한 적이 있는데 하나가 산악연맹이고 다른 하나가 인권단체인 셈이다. 이론이 없으니까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권 관련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인권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란 책에 그림 작가로도 참여했다.
차별금지법은 제정해야 하고, 국가보안법은 폐지해야 한다는 선일 작가. 다른 인터뷰 글을 보니 ‘작가에겐 100%의 자유가 필수적이다. 99%의 자유란 없다’는 주장이다. '다른 것은 해도 된다, 이것은 하지 말고'는 이미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평등하지 않으면, 소수자를 혐오하고 공격하고 핍박하면서야 평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도 중요한 열매도 없는 바람을 노래 삼아 묵묵히 한 인생을 살아가는 더 검어질래야 더 검어질 수 없는 까만 나무이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경험을 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이 세상 사람의 인생을 모두 산 그런 깊은 나무, 세상에서 어떤 나무보다 그런 묵직한 검은 나무가 되겠습니다.’ 중2의 다짐 그대로 ‘검은 나무’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슬쩍 엿듣고, 그이가 좋아하는 산 같고 바위 같은 모습 또한 슬쩍 엿본 느낌이었다.
요즘 작품 관련 관심사를 물으니 그동안 좁은 곳에서도 가능한 평면작업 위주였는데 입체작업의 욕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설치작업과 조형작업도 다시 하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다. 목공을 했다 하면 집을 고치고, 수영을 했다 하면 강사를 하고, 산을 탔다 하면 구조대를 하는 다재다능 팔방미인 선일 작가의 이후 작업은 어떤 형식으로 펼쳐질지 궁금 가득이다.
극한미술관 展 판매작품은 판매 후 작품가의 50%를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의 복직투쟁 기금으로 전달합니다.
구매하신 작품은 기획전이 끝나는 3월 31일 이후 배송해드립니다.
아래 양식에 맞게 메세지를 보내 구매의사를 알려주시면, 확인하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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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와 세 번째 판매 작품은 구매 희망자에 한해 작품가를 안내해드리고,
작가의 작업실에서 작품 실물을 보실 수 있도록 작가와 약속을 잡고 동행해드립니다. 새로운 경험이 되실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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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 구매 희망자만 적어주세요. 소품은 3만 7천원 이상 자율 책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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